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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일: 2024-03-07 12:52 (수정일: 2024-03-07 12:54)

제목 60년 전 ..옥소호의 기억을 떠올리다_목포가는 여객선
작성자
이종호
조회
207

옥소호의 기억을 떠올리다_목포가는 여객선

                                                                                                                           글쓴이 재경향우(소앵무) 조국준

196412월 나는 처음으로 진도를 벗어나 뭍으로 나갔다. 그때는 진도면 해창(고작굴)에서 옥소호를 타고 목포로 나갔다. 옥소호는 1951년 해남호 침몰 사건으로 고모를 잃은 소전 손재형이 거금을 투입하여 만든 여객선이다. 이름은 할아버지의 호 옥전玉田에서 옥, 그리고 자신의 호 소전素筌에서 소를 땄다. 옥소호는 동력선으로 102톤 급 목선이었다. 요즈음 웬만한 연안 여객선이 200톤 이상이므로 절반 크기인 것이다. ‘옥소호는 하루 한차례 진도와 목포를 오갔다. 아침 9시에 고작굴을 출발하여 오후 12시 반경 목포에 도착하였고, 그리고 다시 오후 2시 즈음에 목포항을 출발하여 6시경 고작굴로 돌아왔다. 산월 앞바다, 해남 화원과 장산도를 거쳐서 목포로 가는 대략 3시간 반의 뱃길이었다. 파도가 심한 날이나 손님과 짐이 많은 날이면 30분 정도 지연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목포항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각자 갈 길로 흩어졌다. 어떤 사람은 목포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들고 다시 진도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부산으로, 그리고 서울로 떠나갔다.
 
오가는 옥소호는 늘 만원이었다. 그리고 항구의 향수인 비린내가 배어있었다. 옥소호에는 4개의 객실이 있었다. 갑판 위에 앞뒤로 2개의 객실이, 갑판 아래에 1개의 객실이, 그리고 조타실이 있는 배의 2층에 작은 객실 하나 더 있었다. 객실은 모두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객실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달랐다. 1층 갑판의 2개 객실은 주로 여자들이 많이 자리 잡았다. 개구쟁이 아이들, 칭얼대는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는 아낙네, 아는 분을 만나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아주머니이곳 객실은 늘 소란스럽고 번잡했다. 갑판 아래 객실은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조용하였고, 조명은 20와트(?) 소형 전구로 다소 어두운 편이었다. 배 멀미를 하시는 분들이나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한숨 자고 가려는 분들은 이곳으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2층 객실은 남자들의 세계였다. 명절이나 배가 만원인 경우이외에는 이곳에서 여자들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흔들거림이 심하여 배 멀미를 할까봐서 그랬을까? 그런데 중년이상의 남자들, 그 당시 내 눈에는 어른들로 보였던 분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른 멸치에 소주를 한잔하시는 분들, 걸쭉한 남도 방언으로 신명을 돋우며 삼봉을 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만큼 아래층의 포근한 사투리와 달리 거친 표현도 나타났다. , 배의 화장실은 1층에 있었다. 갑판 뒤로 배의 고물 쪽이다. 화장실 변기 아래로는 넘실거리는 파도를 볼 수 있었다. 요즘 같이 환경오염을 통제하는 시대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옥소호가 목포항을 출발할 때는 안내 방송이 있었다. “모든 승객은 안전한 선실로 들어가라는 내용이다. 목포 선박 통제소를 벗어날 때까지는 갑판 위에 머물 수 없었다. 목포항을 지나면 곧 유달산이 오른편으로 나타난다. 왼편으로는 고하도이다. 이윽고 달리도 등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객실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하나 둘 약속이래도 한 것처럼 2층 갑판으로 올라왔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답답한 선실을 벗어나 오랜만에 보는 바다를 구경했다. 나도 늘 2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배 뒤쪽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엔진의 화통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 나온다. 목포항을 떠나가는 길손을 배웅하러 갈매기는 거기까지 함께 날아왔다. 그 이별의 세레모니가 고마워서 먹던 새우깡을 던지면 순식간에 더 많은 갈매기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도 목포항이 멀리 사라질 때면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파도가 달리는 배를 맞아준다. 파도는 배를 향하여 달려왔다가 뱃머리에 부딪혀 두 갈래로 나뉜다. 그리고 다시 고물에서 만나며 하얀 거품을, 길게 그림자처럼 남긴다. 바다는 가끔 화를 내기도 하지만 순한 날이 훨씬 많다. 진도 가는 바다는 대체로 잔잔하다. 작은 파도만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린다.
 
목포항을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달리도’, 그리고 왼쪽으로는 화원반도 북쪽에 있던 목포 옛등대가 나타난다. 옥소호는 왼쪽 화원반도를 끼고 남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오른편에 돌섬인 시하도가 보이고 멀리 안좌도도 보인다. 안좌도는 안창도와 기좌도가 간척으로 하나가 된 섬이다. 남쪽에 있던 기좌도는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의 고향이다. 제법 널찍한 바다로 들어서게 되니. 파도도 센 놈이 온다. 그 파도에 배도 약간씩 흔들거린다. 그래도 멀리 보이는 조그만 숱한 섬들이 가까이 다가서고 다시 멀어지며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진도 가는 바닷길은 아름다운 섬과 섬으로 이어졌다.
 
목포에서 출발한 옥소호의 첫 기항지는 장산도이었다. 장산도가 가까워지면 옥소호는 바다 위에서 길게 고동을 울린다. 그 신호에 맞추어 조그만 목선(우린 뗏마라 불렀다)이 바다위의 옥소호를 향해 노를 저어 왔다. 사람들은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짐도 옮겨 싣는다. 이윽고 하선이 끝나면 옥소호는 긴 고동소리를 다시 울리고 진도로 향한다. 목선은 옥소호가 남기는 파도로 위험스럽게 출렁거리면서 점점 멀어져 간다. 장산도를 지나면 왼편으로 진도가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군내면 덕병 앞바다를 지나게 된다. 1960년대까지는 산월 앞바다를 지나서 서(西) 소포에 정박하고, 읍내 해창(고작굴)까지 운항하였다. 그러나 해창에 토사가 쌓이면서 더 이상 옥소호 규모의 배는 다니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쉬미항으로 기항지가 바뀌었다. 여객선도 옥소호에서 진도호로 바뀌었다. 진도호의 크기는 옥소호와 비슷하였으나 철선이었으며 더 빨리 진도-목포를 운항하였다. 더 이상 화원과 장산의 앞바다에서 사람을 태우거나 내리지도 않았다. 배의 속도가 좋아지고 중간 경유지가 없어지자 진도에서 목포까지 운항 시간은 2시간 30분대로 단축되었다.
 
그러나 바닷길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다. 추석이나 설날에 고향을 찾을 때는 행여 목포항에서 발이 묶일까 배를 타는 순간까지 긴장하게 된다. 정원 초과로 배를 못 탈까 걱정되어 미리 미리 나가서 줄을 섰다. 태풍이 부는 여름날이나 바람이 센 겨울철에는 배가 뜨지 않는 날이 될까 염려했다. 그래서 , 배 뜹니까?”, 배를 탈 일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해운회사에 물어본 질문이었다. , 간혹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여객선 침몰 사고는 두렵기 짝이 없었다. 어른들은 뱃길을 더 두려워하였다. 화원 목장 앞을 지나면서는 파도가 무자게 센 데()‘라고 말했다. 우리 세대는 모르는 침몰의 트라우마를 어른들은 가지고 있었을까? 대체로 섬사람들은 바다를 무서워한다. 바다의 노한 모습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전하게, 빠르게, 편하게 뭍으로 갈 수 있기를 늘 갈망한다. 정말 그 소원대로 1984년 진도에서 뭍으로 나가는 진도대교가 개통하였다. 더 이상 파도를 만날 일이 없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진도호를 타고 목포에서 진도로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태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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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 최종수정일 : 2018-02-06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