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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일: 2024-01-21 11:48 (수정일: 2024-01-21 12:18)

제목 답변 없는 진도문화원
작성자
김남용
조회
492


굴포당제보존회 제공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 글씨를 판독하기 위해 
먹을 칠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었다. 



2014년, 본인 촬영. 
당시 지역 간척사에 관심이 있어 굴포에 갔으나, 
당제의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됨. 
이후 '굴포에 대한민국 민간간척 1호가 있었네'라는 기사를 작성해
진도신문에 송고함. 





병인 1986년 4월 18일



글 백포 곽남배
전면서 장전 하남호
후서 백포 곽남배





진도군지. 1976, 2. 25. 발간. 마을 유래 기술
옥주의 얼. 1982. 3. 발간. p131~132. 고산둑, 윤선도 설화 기술

굴포신당유적비가 세워지기 전 
굴포당제 또는 둘레 네 개마을 간척지, 원뚝 관련 기록과 구술에서
삼별초와 배중손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포 선생이 이 비를 세우고, 당을 개축하면서 
80년대 중후반, 여러 민속연구자들과 
NHK, KBS 등에서 굴포를 방문해 기록을 남겼다. 

순수 민속으로서 당제만을 연구한 이들에게 
삼별초와 배중손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당에 세워진 '굴포신당유적비'의 내용을 참고해 
굴포당의 유래를 기술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학자들마다 
굴포 윗당과 아랫당의 명칭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일정기간 굴포마을에 머물며 현장연구를 한 학자들은 
윗당-할아버지당, 아랫당-할머니당으로 기록했으나, 
자료조사만 나와 '굴포신당유적비'의 내용을 참고한 학자들은
비문에 나와 있는 그대로 당 위치를 왜곡해 기술했던 것이다. 
또한 정월 초하루에서 이튿날 있었던 당세배와 
대보름에 있었던 당제와 걸궁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지역 민속을 대하는 연구자들의 게으른 태도 때문이었거나
'굴포신당유적비'의 권위에 굴종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논란을 거쳐
정충사가 용장사지로 옮겨진 2024년 1월 현재까지
그 '굴포신당유적비'를 숙주로 굴포당제를 왜곡하고 있다. 

코미디 같은 사태를 주도하고 있는 곳이 진도문화원이다. 

굴포당제보존회에서는 
1월 19일 올해 당제추진위원회를 열고, 
당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도문화원의 행태에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만약, 진도문화원이 굴포당제를 왜곡하는 사업을
당장 중단하겠다
천명하지 않는다면, 
굴포당제보존회에서는 2월 24일 굴포당제가 열리는 날, 
썩어빠진 '정신문화'를 소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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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 최종수정일 : 2018-02-06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