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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일: 2024-01-18 22:23 (수정일: 2024-01-18 22:26)

제목 Re : Re : 진도문화원 발간 '진도문화' 113호 폐기를 요구하며
작성자
김남용
조회
264

김 형, 보내 준 논문은 제대로 읽고 이해했는지요?
이를테면 나는 어디에서도 '굴포당=배중손당'이라고 논증한 적이 없습니다. 21~22쪽의 요지는 곽남배씨가 1986년에 굴포당을 재건했고, 거기에 배중손의 위패를 봉안하고 당제를 지내다가 1998~99년에는 그 굴포당을 헐고 정충사를 지었으며, 2021년에는 윤씨종친회가 정충사를 고산사로 바꿔버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굴러 온 돌들(곽남배, 윤씨종친회)이 박힌 돌(굴포당)을 빼버린 셈입니다. 이제 이해됩니까? 그래서 굴포당은 지금이라도 양쪽으로부터 배상을 받고 복원되어야 하고, 당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해당 논문 22p]
그런데 202111월에 정충사고산윤선도선생 굴포 사적비시비 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고산사로 바뀌어 버린 이래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즉 국가의 문화재와 사적(史蹟)으로 진즉 지정되었어야 했던 정충사가 일개 사문중(私門中)의 사당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진도군과 전라남도, 그리고 문화재청은 정충사를 복원하고 존속시킴으로써 배중손의 자주적인 국가관과 반()중화주의적인 역사의식을 선양해야 할 것이다.‘
 

이세영 선생님, 이러한 서술은 고산사를 헐고 정충사를 다시 복원시키라는 주장 아닌가요? 제가 행간을 잘못 읽었습니까?
 
그리고 고산사로 바뀌기 전에 그 전제로 윤선도가 굴포에 와서 직접 간척했다는 것이 밝혀져야 하기때문에 나는 논문에서 그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논증했, 이에 따라 고산사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논문을 여러차례 읽어봤으나, 고산 선생의 굴포 거주와 방축 개축을 부정하는 논증은 없고, 기존 설은 시기가 맞지 않다거나 오지 않았을 거라 추정된다는 정도로 읽혔습니다. 논문 어디에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나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선행 연구자들도 보길도 윤씨문중 사람들이나 굴포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내용을 토대로 그 시기를 추정했던 것인데, 이세영 선생님은 그것을 빌미로 윤선도 선생이 굴포에 와 본 적이 없다, 기존 주장들이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논증을 완료했다는 것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 역시 여러 자료들을 열거하고 있으나, 결국 추정에 불과하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걸 논증하기 위해, 윤선도 또는 그 집안을 과도하게 공격하는 듯한 내용을 증거로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그 때문에 다른 의도가 보인다고 말씀 드렸던 겁니다.
 
 
처음(2024, 1. 16)에 김 형이 나한테 시비를 걸어 왔고, 이후 이리저리 논점을 옮기면서 논쟁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게시판에서 이런 논쟁을 계속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내 준 논문도 읽었으니 이제는 이미 제안한 대로 김 형이 정한 일시에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서 토론합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반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줄곧 이세영 선생님께 반론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강좌와 발표의 주체는 진도문화원이고, 법적으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이나 업무방해로 피소돼도 진도문화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도문화원의 선행 연구 자료들은 고산둑을 부정하지 않았고, 주민들의 구술 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왔습니다. 이는 2003년 윤씨종친회에서 진도군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합의 조정으로 결정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조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당제의 주체인 마을주민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이세영 선생님의 주장처럼 윤선도와 배중손이 굴포당을 빼앗은 게 아니라, 윗당은 굴포마을당, 둑에 있는 아랫당은 공동의 당제를 지내면서도 고산 선생께 감사의 예를 드렸다는 주민들의 주장을 진도군이나 재판부가 인정한 것입니다.
 
다만 두 가지만 묻겠습니다. 하나는 굴포신당유적비 비기를 곽남배씨가 썼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를 보여 주시고, 그 굴포신당유적비의 행방도 알려 주십시오.
 

이세영 선생님께서 인용하신 굴포신당 유적비문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신당유적비는 백포 선생께서 직접 만드셨다고 봅니다. 19864월 당 개축시 굴포신당유적비도 세운 것이라 판단되고요. 현재 그 비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2022년 말경에야 굴포당제보존회로부터 당제보존과 전승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임회민속놀이전수관장 자격으로 작년에 처음으로 당제 실무자로 참여했습니다. 굴포 분들은 곽남배 선생을 지금도 존경하고 감사해 하고 계십니다만, 배중손 사당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 말씀하십니다. 그 과정을 눈앞에서 모두 보신 분이고 참여도 하시고 했으나, 당을 지키시는 분들이 부정을 저지르며 당제를 모실 수 없었기 때문인지 반기를 들고 항의시위까지 한 거지요.
 
또 한가지는 '문화원장이 바뀌어서 문화원이 자기 부정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전 박주언 문화원장은 '정충사''고산사'로 바뀌는 데에 동의했다는 것입니까?
 

앞서 말씀드렸듯, 그 동안 진도문화원은 향토지나 진도문화 등을 통해 고산둑을 기정사실화하고 진도의 향토사로 기술해왔습니다. 박주언 전 원장님이나 오판주 현 원장님 개인적 판단은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진도문화원 전체의 기조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진도문화에 자유기고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동안 진도문화원이 유지했던 향토사를 한순간에 부정하는 일은 진도향토사 전체를 모독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된 연구와 기술에 대해, 언제 누구나 반론할 수 있고 수정을 요구할 수 있겠죠. 더구나 학문의 과정이라면, 이세영 선생님의 논문도 실을 수 있겠죠. 그러나 굴포당제는 지금껏, 법원까지 가서 조정이 되었음에도 이십 년 넘게 행정이 이행을 하지 않는 바람에 고산사정충사를 밀어낸 것처럼 인식돼 버린 것입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는데, 모르는 사람은 윤선도집안이 배중손 집안을 힘으로 쫗아냈다는 식으로 인식하게 된 거죠. 진도군 행정 난맥이 만들어낸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또 얘기하지만 윤선도의 유적지를 부정하려는 자는 진도문화원이 아니고 이세영이니 이세영 논문을 비판할지언정 진도문화 113호 전체를 폐기하라고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는 매우 부당하고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문화원이 내 논문의 게재 여부를 결정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문화원에 재심의를 요구할 수는 있겠지요. 만일 게재 불가로 결정한다면 나는 다른 학술잡지에 투고해서 게재 여부를 심사받을 예정입니다. 나는 진실을 밝혀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역사학자의 의무 이행에 늘 충실하려고 합니다.

추기: 언제 무슨 재판이었는지와 판결문도 알려 주십시오.
 

, 사실은 법원에서 조정되고 합의하고 결정된 내용이기 때문에 진도문화원에서 주도적으로 진도군의 합의이행 과정을 방해한다면 업무방해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고산사2003년 법원을 통해 결정된 내용을 이제야 이행한 사업이고, 진도군이 지금도 이행하지 않고 있는 합의사항도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아시면 부당하다 생각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이세영 선생님의 사적 연구에 대해서 뭐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복해 말씀드리지만, 진도문화원이 예산을 써 가면서까지 그 동안의 연구들을 뒤엎는 행위를 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서 소송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진도문화원에 답을 구한 것입니다. 여하튼 요청하신 자료는 찾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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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 최종수정일 : 2018-02-06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