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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일: 2024-01-16 01:43 (수정일: 2024-01-16 02:51)

제목 진도문화원은 왜 윤선도 유적지를 부정하려 할까?
작성자
김남용
조회
406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지도다. 
굴포와 신동, 백동, 남선이 간척지 논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심장 모양의 담수지가 보이고, 
해안가에 방축도 표시돼 있다. 

진도문화원은 2023년 10월 24일, 
<해남 윤씨가의 굴포농장 경영>이라는 '진도문화원 역사문화강좌'를 열었다. 
나는 행사가 끝난 후에야 일부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 핵심은 윤선도가 쌓았다는 굴포 둑은 '억측'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논거를 보면, 
실증사학자의 논리인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윤선도는 굴포에 오지 않았다'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한다면서, 
조선시대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시기
윤선도 조상들에 대한 비판 상소문들을 그대로 인용하며, 
해남윤씨가를 탐관오리로 낙인 찍고 있었다. 
당시 권력을 잡는 파가 역사를 새로 썼던 시대라는 걸 가정해 보자.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역사학자는 윤선도 집안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반박하는
상소문에 대해서는 생략해 버렸다.
그 의도는 분명해 보였다. 
윤씨 가문은 악행만 저질렀으며, 
해언전 개발 또한 수탈의 역사였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증사학자라면, 
윤선도가 진도 굴포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실적 근거를 내세워야 하는데도
발표 자료 어디에도 그러한 실증은 없었다. 

근현대 기록에서 '고산둑'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육지측량부 지도, 진도군지, 옥주의얼, 구전, 당제 등 
그런데 역사학자는 억측이며 설화일 뿐이라고 한다.
이 역사학자의 주장을 들은 사람들은
이제 고산윤선도 선생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감사제가 
'거짓'이라며 삿대질한다. 
실제 작년에 고산 감사제 끝날 무렵, 
문협 회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세영 교수가 논문에서 고산둑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면서 
윤씨문중 관계자를 비판하기도 했다. 

역사학자는 자신의 발표 자료에서
'윤선도가 집안에서 물려받은 굴포 전답이 630여 마지기'라고 했고, 
그 가운데 280여 마지기는 묵어버린 전답이라 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 역시 
적어도 윤선도의 조부 또는 증조부 때부터 굴포 간척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경작이 가능했던 340여 마지기보다
묵은 전답 280마지기의 윤선도 땅에 의미를 둬 보고자 한다. 
당시 경작이 어려웠지만,
윗대부터 언전으로 인정받아 물려받은 땅이었다. 
요즘 넓이로 환산해 보면 56,000평 정도 될까. 
조상이 언전을 개발했을 때는 경작이 가능해 소유권을 인정받았지만, 
내가 물려받을 시기에 
둑이 무너져서 경작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새로운 둑을 축조하려 했을 것이다. 
윤선도에게는 해남에도 많은 땅이 있으니, 그냥 방치했을 것인가?
역사학자가 당시 윤선도였다면,
둑만 잘 쌓는다면, 쌀 생산이 가능한 56,000평을 그냥 내벼려 뒀을 것인가? 
아니면 바닷물이 들이닥치지 않게 둑을 쌓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쓸모있게 만드려고 노력했을 것인가? 


다시, 
위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자. 
지도에 정확하게 표시돼 있지는 않지만, 
밀물 때 굴포 둑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던 통로는 
굴포마을 앞 하천과 
굴포당(현 고산사)에서 30여 미터 지점이었다. 
일제 때 염전으로 개발되고, 이후 방축 공사로 재간척이 되었을 때도 
그 나들목은 남아 있었다. 
여전히 담수호는 지금도 옛 염분을 기억한 채 일부 남아 있다. 

윤선도 소유, 진답 286마지기는 
그 담수호 둘레였을 것이다. 
굴포.....좁은 만을 따라 밀물이 밀려드는 속도는 
다른 어느 바다 만보다 빠르다. 
둑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1910년대 지도에 보이는 담수호는 
윤선도 시대 담수호보다 줄어들었을 것이다. 
윤선도가 '설화'에서처럼 
무너진 둑을 보강해 새 둑을 쌓았다면, 
진답 286마지기 가운데 상당 면적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되돌려 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1969년 굴포 항공 촬영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난 후, 
중장비를 동원한 축조술로 둑을 쌓았는데도 
옛날 바닷물 나들목은 남아있다. 
썰물 때 고산둑에서 갯벌을 바라보면, 지금도 흔적이 보인다. 
굴포 사람들은 십일시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바닷물이 넘치는 때를 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지도의 간척지로 추정되는 '답'을 현재의 위성 지도에
매칭해 보면, 
대략 845마지기가 나온다. 


담수지는 대략 300여 마지기가 나온다. 845-300=?

일제강점기 육지측량부에서 만든 지형도에 오차가 있더라도
윤선도 집안이 진도 굴포에서 소유했던 언전 630마지기를 
이 세 지도 안에서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전답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노비였다. 
노비가 직접 언전 개발 신청서를 관으로 가져가서 허락을 받았다. 
윤선도가 직접 해남 땅끝이나 보길도에서 배를 타고
진도 굴포에 와서 자기가 물려받은 땅 가운데
경작이 어려운 286마지기를 좋은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노비들과 소작인들은 충분히 진답을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윤씨집안에서 만든 '굴포화곡기(窟浦禾谷記)'와 같은 문서에는 
진답(묵은 논)일 경우, 소작료가 면제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윤씨집안 또한 천수가 닿지 않은 땅, 즉 버려진 땅을 개발해 
소유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소작인들에게도 진답을 주고 무상으로 경작하게 했던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굴포 간척지에서 윤씨 집안이 소유한 경작지는 
지속적으로 줄게 된다. 
소작쟁의 과정을 통해 싼값에 토지를 매각하거나,  
무상 경작지에 대해서는 무상 불하도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더 연구할 부분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굴포 둘레 주민들이 당제를 모시면서
윤씨집안에 감사의 의미를 담았다면, 
바로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유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진도군지, 옥주의얼, 진도군의문화유적 등의 연구자들은
윤선도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그 근거를 주민들의 구전에 두고 있다.
그 구전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당제를 모시는 주민들이 제시할 필요가 있을까? 

진도문화원은 
역사문화강좌를 열어 
'고산둑'은 설화일 뿐이며, 억측이라 주장한다. 

윤선도가 진도에 와서 머문 시기를 특정할 만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윤선도가 굴포 땅 630마지를 소유했고
자식들에게도 물려줬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굴포에서 벌기 어려운 진답(담수호 부근)에 대해서는 소작료를 면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역사학자와 그의 주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고산둑 둘레 사람들이 모시는 '당제-감사제'를 무지한 사람들의 
맹신인양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구전, 설화는 사실이 아닌가?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이 아닌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기록이 없다면?

나는 진도문화원이 근현대 진도 향토사학자들의 연구를 뒤엎고
'고산둑'을 부정하는 사업들을 벌이는 이유를 묻고 싶다. 
그 사업에 군민들의 소중한 세금이 쓰이지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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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 최종수정일 : 2018-02-06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