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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일: 2023-12-29 00:15

제목 Re : Re : 명량해전 연구와 해전지역 조사 학술대회(12. 15) 성과 가운데 '철쇄설' 부정에 대해
작성자
이세영
조회
80

김남용님, 말씀 감사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맨 먼저 역사적 사실(史實)을 기록한 기록물(사서, 사료집, 고문서, 그림, 사진, 영상물 등: 예를 들면 정유재란 시의 이순신의 '난중일기')을 가능한 한 모두 수집하고 독해하면서 기록된 사실(史實)이 과연 실재했던 사실(事實)이었는지를 고증(考證)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처럼 실증하는 것이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다음 역사학자들은 각자의 사관(지식과 의식)에 의해서 그 史實=事實을 해석해서 서술(논문, 책 등)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史實=事實을 놓고도 그 해석은 역사학자들 만큼이나 다양하면서 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록물의 부족이나 부실함을 고고학적 발굴(유구, 유물)로써 보완합니다.
현재 국사학계에서는 '명량에 철쇄'을 설치했었다는 기록은 택리지 외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중환은 김남용님처럼 추정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택리지 외에 다른 많은 기록을 찾아야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수중 발굴'을 통해서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런데 '수중 발굴'을 할 때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명량해전 장소'가 어디였는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그날 발표와 토론에서 '해전 장소'로는 두개의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는 '우수영 해로'이고, 둘은 '명량 서북단 쪽의 넓고 긴 해역'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60, 70년대에 제기되었던 명량에 철쇄를 설치했었을 거라는 견해는 이미 폐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의 두 군데 어디에도 철쇄를 설치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시피 어디에도 물쌀이 세지 않았기에 철쇄의 효과를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튼 앞으로 문헌 기록도 더 찾아야 하겠고, 해전 장소에 따른 수중 발굴도 시도해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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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 최종수정일 : 2018-02-06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