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닫기

군정소식

작성일: 2007-05-23 18:57

제목 진도 금갑진성 발굴 본격화

진도 금갑진성 발굴 본격화 첨부#1

해안방어시설인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일원의 '금갑진성'에 대한 발굴 작업이 최근 시작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남도 기념물 제234호로 최근 지정된 금갑진성은 지난 2월12일부터 4월17일까지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팀이 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금갑진성 발굴로 육상방어핵심시설인 '산성'과 대비되는 전남지역 해안방어시설 '진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조사결과 서벽과 북벽 일부를 비롯 치 3개소, 북문지(옹성 포함)가 확인됐으며, 당초 성벽은 대부분 훼손됐을 것으로 추정됐으나 원형 보존 상태로 발굴됐다.
또 성벽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등성이를 따라 서쪽과 북쪽으로 각각 154m와 182m길이로 뻗어있고 큰 돌덩이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넣는 방식인 ‘잔돌끼움 쌓기 방식’ 으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축조된 진성으로 확인됐다.

특히 금갑진성은 조선 후기까지 수군의 주요 군진이 위치했고 명량대첩 당시 군사요충지 중 하나로 해안방어시설로는 드물게 우리 전통적인 성 축조방식이자 독특한 핵심방어시설인 '치'를 확인했다.
이와함께 이번 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해안방어시설의 일반적인 형태에 대한 자료를 축척할 수 있었으며, 더불어 조선시대 군제 변천과 해안 방어시설 변화의 유기적 관련성에 대한 기초 자료를 확보했다.
금갑진은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당시 김통정 장군이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제주도로 떠난 길목이며, 조선시대 때는 수군만호가 배치된 지역이다.
또한 명량대첩 때는 금갑진만호가 이순신 장군을 도운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어 진도의 대표적인 요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이 성은 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각종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던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진도 성곽조에 따르면 금갑진성은 성 둘레 1,153자[尺], 높이 8자[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금갑진성이 500여년 동안 자리했던 주요 조선 수군진이었을 뿐 아니라 축성시기와 방식 등에 비춰볼 때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높아 추가 발굴을 통한 국가 문화재 지정 등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앙문화재 위원으로 역임하고 있고 우리나라 성곽 최고 권위자인 한밭대학교 심정보 교수는 금갑진성을 살펴보고 “금갑진성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학술용역을 통해 더욱 치밀한 연구 성과가 나오면 금갑진성의 국가 사적 지정도 가능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김미경 학예연구사(진도군청)는 “축성시기와 방식을 고려해도 이 일대는 해상수송의 길목인데다 다도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군사 요충지였던 것으로 평가된다"며 ”향후 학술용역을 실시한 후 국가 사적 지정을 추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공공누리마크 제 1유형 (출처표시) 진도군청에서 창작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만족도
60%
고객만족도 평가
진도 금갑진성 발굴 본격화 | 상세 | 군정소식 : 진도군청 페이지 링크 QR코드 URL:http://www.jindo.go.kr/home/sub.cs?m=626
QR Code 이미지를 스마트폰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이 QR Code
『군정소식』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