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6월

작성일: 2024-01-18 08:59
이세영 역사학자께서 올려놓은 '유감문'을 읽고 또 읽어보아도
"윤선도가 진도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내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진도문화 1월호에 관련 내용을 실어놓았다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만,
유감문과 같은 내용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님께서 인용하신 '굴포신당유적비'는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요?
그 연대부터 연구하시고 그 유적비문을 사료 삼아서
삼별초 항전지와 배중손 장군 전사지를 유추해야 할 것 아닌가요?
굴포 출신 백포 선생께서 진도로 귀향해
추진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문화재만들기'로서 '삼별초 항전지'였는데,
사당을 짓고 동상까지 세웠는데도 문화재가 되지 못한 이유는
귀하께서 현재 '고산사'를 빌미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군사정권이던 시절, 굴포에 삼별초를 소재로 하는 문화재를 만들고자 했던 노력에서
백포 선생의 '고향사랑'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전에는 삼별초고 배중손이고 없었당께"
백포 선생이 나서기 전이겠지요.
역사학자님께서 올린 글에서 '삼별초'에 대한 인식을 잘 알겠습니다.
삼별초를 비판하면, 중화주의 정도로 배척하시네요.
원 지배 때 문신과 무신이 서로 왕권 싸움을 하던 시기에
문신들에 밀려서 패주하던 무리가 잠시 9개월 동안 진도에 머물렀다
다시 제주도로 도망 간 사건이 아닌가요?
삼별초 항몽사야 말로, 반도사관의 전형이 아닐까요?
고조선-고구려-신라가 과거 대륙을 지배했던 사실,
천년 고려의 망국사 끝자락에 '삼별초'라는 무신 쿠데타세력이
권력을 잃고 진도로 밀려와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볼모로 잡아온 '왕'을 버리고,
자기 살겠다고 제주-일본으로 도망간 자주 항몽사.
위대한 오랑국 왕이 죽을 때,
배중손은 굴포 갯벌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 죽었다(역사학자 주장) 하고,
김통정은 제주도로 도망 갔는데,
이게 무슨 왕국의 군대일까요? 패주 세력이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배중손 장군이 굴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굴포신당유적비'의 비문에 나와 있다면,
그 비문을 쓰고 비를 만드신 분이 누굴까를 먼저 찾아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 비 때문에 배중손 사당이 문화재가 되지 못했고,
재판에서도 졌다고 봅니다.
역사학자님은 '그 비문'에 꽂혀서
윤선도의 업적은 전혀 눈에 안 보이시나 봅니다.
당제와 감사제를 지낸 주민들의 말씀도 전혀 안 들으시려고 하고요.
언전 개발을 탐관들의 수탈 행위로 보는 관점 또한
시비거리로 만들려는 속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삼별초의 난을 대몽항쟁으로 미화하는 데
앞장 서시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삼별초가 진도에 와서 9개월 머무는 동안,
진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수탈을 당했을까요?
말 안 들으면, 마구 칼로 죽이던 무신들에게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굴포신당유적비를 누가 만들었는지 밝히시는 게 먼저일 거라고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굴포신당유적비에 적힌 '윤선도'는 부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윤씨집안이 굴포농장을 경영했다고 제목 달고,
윤선도는 굴포에 오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했다, 끝장토론하자~~
대체 역사학자님의 논리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역사학자님 논문에 인용한 자료들에서는
온통 윤선도 또는 윤선도 집안 대대로 굴포 전답을 소유하고, 수곡을 받았으며,
벌기 어려운 땅은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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