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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문화가 있는날' 상영 DVD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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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저녁 7:00 ~ 8:00
7월 1일(수)
1.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 다비드 상
1501년 5월 미켈란젤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로 돌아온 뒤 그 해 8월부터 새로운 도시를 위한 예술 작품을 제작한다. 이를 위해 시에서 제공한 5.5미터의 거대한 대리석은 일찍이 서투른 조각가에 의해 망가져 피렌체의 작업장에 40년 가까이 방치되어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다루기 곤란한 대리석으로 힘이 넘치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 <다비드상(David)>(1504)을 만들어내었다.
<다비드상>은 5.17미터의 대리석 조각으로 골리앗(Goliath)을 돌로 때려 쓰러뜨린 성서의 소년 영웅 다비드를 표현한 것이다. 본래 이 작품은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의 동쪽 지붕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시청 앞 시뇨리아 광장(Palazzo della Signoria)에 세워져 1504년 9월 8일에 공개되었고 국가의 영광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이후 1873년에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Accademia Gallery)으로 옮겨졌으며 원래의 자리에는 복제본이 세워졌다.
7월 8일(수)
2. 드가(Edgar De Gas) - 14살 소녀 발레리나
드가는 그림에 참고할 목적으로 1860년대부터 조각을 해왔다. 많은 수가 파손되고 현재 남은 것이 150여점 되는데, 그 중 전시할 목적으로, 비교적 큰 규모로 만든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1881년 인상파전에 출품한 이 작품은 실물의 2/3 정도의 크기인데, 몸체를 왁스로 만들고 실제 발레복 상하의, 스타킹, 신발, 리본을 착용했으며 진짜 가발을 씌우고 부분적으로 왁스를 덧붙여 고정해 놓았다. 1970년대에 듀안 핸슨등이 만든 슈퍼리얼리즘 작품을 본 현대인에게 이 정도의 장치가 놀랍게 보이기는 힘들지만, 1877년에 살롱에 출품되었던 로댕의 "청동시대"가 그 리얼리티 때문에 논란을 빚었던 당시의 정황을 생각하면, 드가의 조각이 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흰 대리석이나 견고한 청동으로 순수하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여성 인체 조각이, 환상을 위한 여분이 전혀 없이 현실과 밀착해버린 모습은 보수적인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 자기만의 생각에 잠긴 소녀의 얼굴과 표정이 짐승같고 오만하고 범죄자 같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실물보다 작고, 유리상자까지 씌워 전시한 이 작품은, 인류학 자료나 민속학 표본 같았다. 이 작품을 ;조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근대적 발전; 이라고 본 칭송자들이 주목한 것도 과학적 자연주의자 드가가 보여준 이상화되지 않은, 너무나도 산문적인 리얼리티였다.
7월 15일(수)
3.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이 발표된 1907년 이전까지, 입체주의라는 용어는 화단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듬해인 1908년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화가 조르주 브라크의 그림을 묘사할 때 처음 사용한 용어로, 그려진 대상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마치 입방체처럼 보인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현대 미술의 본격적인 전개는 20세기 초로 보는데, 현대 미술 운동 가운데 가장 과격한 혁명으로 꼽히는 입체주의는 전통적인 회화 제작 기술에 역행했다. 전통 회화가 2차원 캔버스 위로 3차원 대상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역사였다면, 입체주의는 정반대로 3차원 대상을 2차원 캔버스에 걸맞게 면들로 해체한 후 늘어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줬다. 이것은 회화의 권위와 가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파블로 피카소 역시 ‘충격을 줄 목적’으로 이런 시도를 감행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곧잘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에는 다섯 여성의 누드가 등장하는데, 바르셀로나 아비뇽 인근 사창가 여성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구성이 심상치 않다. 여성들의 인체, 천, 커튼, 그리고 배경이 원근법에 구애되지 않고 하나의 면 위에서 뒤섞여 처리되었다. 그림 하단에 놓인 과일 담긴 탁자는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을 담고 있어 여성을 보는 각도와 충돌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묘사된 대상이 전부 입방체로 변환된 것은 아니다. 때로는 19세기 말 유럽 예술계를 강타한 원시 아프리카 미술의 모티프도 뒤섞여 나타난다.
그림 우측의 여인 둘은 서부 아프리카의 원시 가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전한다. 그림의 이러한 과도기적 성격 때문에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이 그림이 ‘미완성’ 상태라고까지 평가한다. 한편 피카소의 그림들에서 성병에 대한 화가 자신의 두려움을 읽어낸 바 있는 존 버거처럼, 미술사가 윌리엄 루빈도 <아비뇽의 처녀들> 속에서 변형되어 그려진 얼굴이 매독 증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현재 이 그림은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의 소장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7월 22일(수)
4.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며,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1830년에 제작되었고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에서 시민군을 이끄는 이는 알레고리로 표현된 자유의 여신으로서 공상적인 현실, 즉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비현실의 진리를 대변한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 10월 18일 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현대적인 주제, 즉 바리케이트전(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7월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의 관심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들라크루아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감성과 개성,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이용하여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이다. 회화 기법에 대담한 혁신을 가져온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1831년 살롱에 출품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며 7월왕정의 수반인 필리프가 작품을 사들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 때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진열되기도 하였다. 들라크루아가 죽은 뒤인 1874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
7월 29일(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한국영화) - 다큐멘터리 86분, 전체 관람가
80년 5월 18일, 그날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 사랑하는 사람들...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 다만, 꿈이길 바랐습니다
우리는 76년째 연인입니다.
우리는 76년째 연인입니다.
89세 소녀감성 강계열 할머니, 98세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
이들은 어딜 가든 고운 빛깔의 커플 한복을 입고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이다.
봄에는 꽃을 꺾어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고, 여름엔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가을엔 낙엽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는 매일이 신혼 같은 백발의 노부부.
장성한 자녀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던 강아지 ‘꼬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꼬마를 묻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져 가는데…
비가 내리는 마당, 점점 더 잦아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던 할머니는 친구를 잃고 홀로 남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머지 않아 다가올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한다.
